집의 기억을 어루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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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기억을 어루만지다

서울 성북동의 한 집에 축적된 기억과 시간을 아버지와 아들의 작품으로 살펴보는 전시가 열린다. 성북구립미술관은 2026 성북아트위크 특별전 《서세옥·서도호: 어루만지다(撫)》를 2026년 10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 수묵화의 거장 서세옥과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서도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조명한다. 두 작가가 공유한 성북동의 집을 중심으로 집과 기억, 인간과 존재, 관계와 시간이라는 주제를 풀어낸다. 같은 공간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표현 방식을 거친 두 예술 세계가 미술관 안에서 나란히 펼쳐진다.

두 예술가를 잇는 성북동의 집

집은 가족의 일상과 어린 시절의 기억, 오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이는 장소다. 이번 전시에서 성북동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두 작가의 사유와 예술을 이어 주는 중심축으로 제시된다.

서세옥에게 성북동의 집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유의 공간이었다. 서도호에게 같은 집은 가족과 함께한 시간과 아버지의 손길이 남은 기억의 공간이었다. 전시는 두 사람이 공유한 장소를 통해 한 세대의 예술이 다음 세대의 감각과 작업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전시 제목에 쓰인 ‘어루만지다’는 이러한 관계를 함축한다. 공간의 표면을 손으로 더듬듯 기억의 흔적을 되살리고, 아버지가 구축한 예술 세계를 아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마주하는 의미가 담겼다. ‘撫’라는 한자 역시 손으로 부드럽게 만지고 보듬는 행위를 가리킨다.

한지와 흑연으로 되살린 흔적

서도호는 성북동 집의 담벼락 문양과 정원에 놓인 석조물 등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는 공간 일부를 한지로 감싼 뒤 흑연으로 문질러 형태를 옮기는 탁본 작업을 선보인다.

탁본은 대상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형태와 무늬를 기록하는 전통 기법이다. 표면의 굴곡과 세월이 만든 흔적이 종이 위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기억을 시각적으로 되살리는 이번 작업과 맞닿는다. 집 안팎에 남은 자국은 단순한 문양을 넘어 가족이 공유한 시간과 공간을 환기하는 매개가 된다.

작가는 집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곳에 남은 표면과 자국을 옮긴다. 관람객은 한지 위에 드러난 흔적을 따라가며 성북동의 집이 두 작가에게 어떤 장소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익숙한 집의 일부가 작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사적인 기억이 예술의 언어로 확장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선과 여백으로 그린 인간

서세옥은 먹과 종이라는 전통 재료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 수묵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가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선, 화면에 넓게 남겨진 여백을 활용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을 볼 때는 화면에 나타난 사람의 형상뿐 아니라 선의 움직임과 여백의 역할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제된 획은 인물의 몸짓과 관계를 드러내고, 비어 있는 공간은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고 어우러지는 장면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서세옥은 동양적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고립된 개인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인간은 사회공동체와 자연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의 화면에는 서로 어우러지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1976년작 ‘삼대’를 비롯한 작품에서는 세대와 인간의 관계가 먹의 선으로 표현된다. 1978년과 1997년에 제작된 작품도 함께 소개돼 서세옥이 오랜 시간 탐구한 인간과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춤추는 사람들’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움직이는 듯한 경쾌한 생동감이 나타난다.

연결된 존재를 보여주는 카르마

미술관 2층에서는 서도호의 ‘카르마(Karma)’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카르마, 즉 ‘업’은 불교의 연기 사상과 맞닿아 있다. 모든 존재가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인과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6년 신작인 두 점의 ‘카르마’에는 수많은 인간 형상이 서로의 어깨와 머리에 이어지는 구조가 나타난다. 한 사람의 몸은 다른 사람과 맞닿고, 그 연결은 위아래로 계속 이어진다. 작품은 개인의 존재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내용을 시각적인 구조로 보여준다.

서세옥의 ‘인간’ 연작이 절제된 수묵의 획과 여백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적 인간관을 드러낸다면, 서도호의 ‘카르마’ 연작은 시공간과 인과관계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인간의 유대와 연결을 형상화한다.

두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표현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선의 움직임으로 인간과 관계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서세옥의 화면에서 사람을 잇는 먹의 선과 서도호의 작품에서 수많은 형상을 연결하는 구조가 세대를 넘어 서로 마주한다.

서도호의 2016년작 ‘작은 문 지붕(Small Gate Roof)’도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STPI 수제 코튼지에 젤라틴지와 실을 사용해 제작됐다. 서세옥의 수묵 작업과 함께 배치된 작품들은 종이와 선을 다루는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가족 관계를 넘어선 예술의 연결

전시는 서세옥과 서도호를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가족 관계로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서세옥이 성북동에 구축한 예술 세계와 그 공간에 축적된 기억을 서도호가 자신만의 시선과 매체로 되살리는 과정을 함께 다룬다.

같은 집을 공유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고 각기 다른 예술적 언어를 발전시켰다. 한 사람은 먹과 여백으로 인간 공동체를 그렸고, 다른 한 사람은 공간의 흔적과 연결된 인체를 통해 기억과 관계를 표현했다. 관람객은 두 작업을 오가며 각자의 예술이 어디에서 갈라지고 어떤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성북동의 집은 두 작가의 삶을 담은 배경인 동시에 세대와 기억, 존재와 관계를 연결하는 작품의 출발점이다. 전시장은 집의 물리적인 형태보다 그 안에 남은 시간과 사람의 관계에 시선을 집중한다. 작품 사이를 이동하는 관람객의 눈앞에는 먹으로 표현된 인간 군상과 한지에 옮겨진 건축의 표면, 서로 연결된 수많은 형상이 차례로 이어진다.

집과 관계를 돌아보는 관람

이번 특별전은 집을 경제적 가치만으로 평가하거나 여러 차례 이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집은 머무는 건물인 동시에 개인과 가족의 기억이 형성되는 장소이며, 세대의 시간이 축적되는 공간이라는 점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전시를 관람하며 각자에게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이 무리를 이루고 연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작품을 살펴보면 같은 공간을 두고도 서로 다른 기억과 관점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전시장에서는 서세옥의 간결한 먹선과 서도호의 섬세한 재료 표현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공간과 기억을 잇는 흐름은 전시 전반을 관통한다. 작품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한 예술가가 탐구한 인간 공동체와 다른 예술가가 되살린 집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전시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관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살펴보게 한다. 아버지가 남긴 공간의 흔적을 아들이 한지와 흑연으로 옮기는 작업, 서로 어우러진 사람을 먹선으로 그린 작품, 수많은 인간 형상이 연속되는 구조가 하나의 전시 안에서 관계의 의미를 확장한다.

전시 관람 정보

전시명서세옥·서도호 특별전 《어루만지다(撫)》
전시 기간2026년 10월 20일 화요일부터 12월 20일 일요일까지
전시 장소성북구립미술관,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134
전시 작가서세옥(1929~2020), 서도호(1962~)
운영 시간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오후 5시 30분
휴관일매주 월요일
관람료무료
전시 해설매일 오후 3시, 1회
개인 관람사전 예약 없이 현장 방문 가능
예상 관람 시간약 30분에서 1시간
주차가능하나 공간이 협소함
문의성북구립미술관 02-6925-5011

개인 관람객은 별도의 사전 예약 없이 성북구립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다. 관람에는 약 30분에서 1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안내돼 있으며, 전시 해설은 매일 오후 3시에 한 차례 진행된다.

주차는 가능하지만 공간이 협소하므로 방문 전에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시 운영과 관람에 관한 문의는 성북구립미술관 공개 연락처인 02-6925-5011로 할 수 있다.

《어루만지다(撫)》는 성북동의 집에 남은 삶의 흔적을 출발점으로 두 예술가가 바라본 인간과 관계를 펼쳐 보인다. 먹과 종이, 한지와 흑연, 실과 입체 구조처럼 서로 다른 재료는 집과 기억이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연결된다. 관람객은 작품을 통해 한 공간에 축적된 세월과 두 세대의 예술이 만나는 장면을 차분히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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